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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콜러 (18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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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콜러(1898년)는 독일 공군의 장교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경찰로 근무하다가 루프트바페에 합류했다. 그는 공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공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어 영국 본토 항공전과 라인강 작전에 참여했다. 콜러는 히틀러의 명령에 여러 차례 반대하고 문화재 보호에 힘썼으며, 종전 후 연합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석방된 후 회고록을 출간하고 바이에른 독일 군인 연합 의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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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콜러 (189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3년의 콜러
출생일1898년 2월 22일
출생지바이에른 왕국 글론
사망일1951년 12월 22일
사망지바이에른주 글론
별칭카를 콜러
군 복무
소속 국가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복무 기간1914년 – 1945년
소속 군대공군
최종 계급대장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경력
지휘공군 장군 참모부 총장
수상
훈장기사십자 철십자장
직책
직책공군 장군 참모부 총장
임기 시작1944년 11월 12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8일
전임자베르너 크라이페
후임자권한 대행 한스위르겐 슈툼프
기타
저서Der Letzte Monat (회고록)

2. 초기 생애 및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콜러는 1914년 육군에 입대하여 보병으로 복무한 후 항공대로 전출되었다. 1916년 조종사 훈련을 수료하고 정찰 및 전투 비행대에서 복무했으며, 1918년 5월 영국군에 포로로 잡혔다.[1] 1919년 석방된 후 경찰 업무를 수행했으며, 1935년 루프트바페로 전직했다. 1936년 공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했다.[1]

2. 1. 출생 및 성장 배경

콜러는 바이에른 글론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4년 육군에 입대하여 보병으로 복무한 후 항공대로 전출되었다. 1916년 조종사 훈련을 수료하고 정찰 및 전투 비행대에서 복무했으며, 1918년 5월 영국군에 포로로 잡혔다.[1] 1919년 석방된 후에는 다양한 경찰 업무를 수행했으며, 1935년 루프트바페로 전직했다. 그는 모범적인 장교였으며, 1936년 공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했다.[1]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콜러는 1914년 육군에 입대하여 보병으로 복무한 후 항공대로 전출되었다.[1] 1916년 조종사 훈련을 수료하고 정찰 및 전투 비행대에서 복무했으며, 1918년 5월 영국군에 포로로 잡혔다.[1] 1919년 석방된 후에는 경찰 업무를 수행했으며, 1935년 루프트바페로 전직했다.[1] 그는 1936년 공군사관학교에서 수석 졸업했다.[1]

어린 시절부터 항공 기술자 알베르트 히르트(:de:Albert Hirth)의 가족과 친하게 지내 비행기에 관심을 가졌던 콜러는 1914년 8월 항공 부대에 지원했다.[2] 그러나 처음에는 바이에른 예비 철도 대대에서 기초 교육을 받고 철도 기관사가 되었다.[2] 1916년 1월, 본인의 희망에 따라 예비 항공 제1대대로 전속되었고, 여러 항공 부대에서 종군하거나 항공 학교 근무를 거쳤다.[2] 1917년 8월 상등병, 1918년 2월 병장으로 진급했지만, 1918년 5월 25일 격추되어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2]

3. 경찰 근무 및 항공 클럽 활동

1919년 12월에 석방된 후 1920년 2월바이에른주 경찰에 들어가 경찰 항공대에서 근무했다. 일 외에도 비행에 열심이었으며, "바이에른 에어로 클럽"에 속해 활공 경기에 몰두했다. 1921년 대회에 바이에른주 대표로 참가하여 640m의 기록으로 활공 최고 기록을 세웠지만, 곧 갱신되었다. 5일 후에는 1900m의 세계 기록(비행 시간 약 3분)을 세웠다. 5일 후에는 고도를 낮추지 않고 선회하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에서 강연 요청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에른스트 우데트와 친분을 쌓았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경찰 운전수로 근무했다. 1932년까지 뮌헨 경찰에서 근무했으며, 1933년 1월에 경찰 대위로 승진하여 뮌헨 경찰학교 교관으로 취임해 경찰의 지도적 입장에 섰다. 나치 정권이 성립되고 독일 공군이 신설되자, 1935년에 대위로 공군에 입대했다. 베를린의 공군 학교에서 배우고 1936년올덴부르크의 전투기대 과정 교관이 되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소령으로 승진했다. 이어서 베를린 가토의 공군 학교 교관을 맡았으며, 1938년 1월에 뮌헨 지구 항공대 수석 작전 참모가 되었다.

3. 1. 경찰 항공대 근무

1919년 12월에 석방된 후 1920년 2월바이에른주 경찰에 들어가 경찰 항공대에서 근무했다. 일 외에도 비행에 열심이었으며, "바이에른 에어로 클럽"에 속해 활공 경기에 몰두했다. 1921년 대회에 바이에른주 대표로 참가하여 640m의 기록으로 활공 최고 기록을 세웠지만, 곧 갱신되었다. 5일 후에는 1900m의 세계 기록(비행 시간 약 3분)을 세웠다. 5일 후에는 고도를 낮추지 않고 선회하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에서 강연 요청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에른스트 우데트와 친분을 쌓았다. 경찰에서는 1922년부터 1928년까지 운전수로 근무했다. 경찰 중위로 승진한 콜러는 1932년까지 뮌헨 경찰에서 근무했으며, 1933년 1월에 경찰 대위로 승진하여 뮌헨 경찰학교 교관으로 취임해 경찰의 지도적 입장에 섰다.

3. 2. 항공 클럽 활동 및 세계 기록 수립

1919년 12월에 석방된 후 1920년 2월바이에른주 경찰에 들어가 경찰 항공대에 들어갔다. 일 외에도 비행기에 열심이었으며, "바이에른 에어로 클럽"에 속해 활공 경기에 몰두했다. 1921년 대회에 바이에른주 대표로 참가하여 640m의 기록을 내어 활공 최고 기록을 세웠지만, 곧 기록이 갱신되었다. 5일 후에는 1900m의 세계 기록(비행 시간 약 3분)을 세웠다. 5일 후에는 고도를 낮추지 않고 선회하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에서 강연 요청을 받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에른스트 우데트와 친해졌다.

3. 3. 뮌헨 경찰 근무

1919년 12월에 석방된 후 1920년 2월바이에른주 경찰에 들어가 경찰 항공대에 들어갔다. 일 외에도 비행기에 열심이었으며, "바이에른 에어로 클럽"에 속해 활공 경기에 몰두했다. 1921년 대회에 바이에른주 대표로 참가했다. 640m의 기록을 내어 활공 최고 기록을 세웠지만, 곧 기록이 갱신되었다. 5일 후에는 1900m의 세계 기록(비행 시간 약 3분)을 세웠다. 5일 후에는 고도를 낮추지 않고 선회하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에서 강연 요청을 받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에른스트 우데트와 친해졌다. 경찰에서는 1922년부터 1928년까지 운전수로 근무했다. 경찰 중위로 승진한 콜러는 1932년까지 뮌헨 경찰에 근무했으며, 1933년 1월에 경찰 대위로 승진하여 뮌헨 경찰학교 교관에 취임해 경찰의 지도적 입장에 섰다.

4. 독일 공군 복귀 및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콜러는 나치 고위층의 명령을 여러 차례 거부하며 소신 있는 행동을 보였다. 1940년 프랑스의 대성당 폭격을 거부했고, 히틀러의 낙하산 탈출 적군 조종사 사살 명령도 따르지 않았다. 군법 회의나 강제 수용소행 위기에 처한 병사와 시민을 구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외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3]

1944년 6월, 콜러는 공군 정책 비판에 대응하여 오버잘츠베르크 회의에서 공군 무기 자원의 취약성을 지적하고, 군 최고 사령부가 공군 무기 프로그램을 지원해야 함에도 소극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최고 군 지도자들의 의무 소홀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며, 헤르만 괴링이 군 최고 사령부의 공군 문제 개입을 막을 것이라는 주장에 반박했다. 콜러는 괴링이 간섭을 싫어하지만, 공군 무기 상황 개선을 위한 건설적 지원은 환영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3]

4. 1.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및 주요 보직

콜러는 독일 공군의 휴고 슈페를레 참모장이었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 동안에도 활동했다. 라인강 작전으로 알려진 국방군의 영국 침공 계획에서, 대령 콜러는 독일 공군 제3항공대의 작전 장교로서 독일 제9군과 협력할 예정이었다. 1943년 10월, 콜러는 ''Chef der Luftwaffenführungsstabes'' ("공군 작전 참모장")가 되었으며, 이는 사실상 참모총장의 보좌관 역할을 했다.[3]

헤르만 괴링의 공군 지휘에 불만을 품은 아돌프 히틀러는 그를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으로 교체하고 싶어했다. 그라임에게 그 역할을 수락하도록 설득할 수 없었던 히틀러는 괴링에게 ''Chef des Generalstabs der Luftwaffe'' ("공군 참모총장")인 중장 베르너 크라이페를 해임하고, 1944년 9월 13일에 잠정적으로 콜러로 교체하도록 강요했으며, 11월 12일에는 콜러가 공식적으로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3] 그러나 콜러는 괴링의 잘못된 관리로 인해 유럽 상공에서 제해권을 잃은 공군을 개혁할 수 없었다.[3]

콜러는 독일 육군독일 해군에 맞서 괴링을 지지했지만, 괴링의 가장 가혹한 비판자 중 한 명이었으며 "괴링은 원활한 협력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같은 느낌, 이것이 자신에 대한 파벌을 형성하게 될 것을 거의 두려워하는 느낌이 들었다."라고 썼다.[3]

콜러는 1945년 4월 20일, 독재자의 마지막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베를린의 히틀러의 ''총통 벙커''에 있었다.[3] 그날 밤 여러 고위 지도자들이 도시를 버렸지만, 콜러는 인근 베르더 (하펠)에서 공군을 대표하기 위해 남았다.[3] 괴링은 떠날 때 참모장의 경례에 답하지 않았다.[3] 콜러는 벙커 내에서 에크하르트 크리스티안 장군이 대리했다.[3] 히틀러는 콜러에게 남은 비행기와 공군 병력을 펠릭스 슈타이너의 베를린 구원에 지원하도록 명령하고, "병력을 억제하는 지휘관은 5시간 안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 마지막 병사가 투입되는 것을 당신의 머리로 보장하라"라고 설명했다.[3] 슈타이너는 그에게 남은 병력이 거의 없어 도시를 방어할 수 없었다.[3]

알프레트 요들이 콜러에게 히틀러가 자살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말한 후, 공군 장군은 4월 23일 오전 3시 30분에 오버잘츠베르크로 날아가 괴링에게 직접 알렸다.[3] 히틀러의 정신 상태가 악화되면서 나치 지도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에서 마르틴 보어만SS 병력을 보내 괴링, 콜러, 한스 람머스를 오버잘츠베르크에서 가택 연금했다.[3] 괴링은 SS 병사들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만류하고 그와 함께 마우터른도르프에 있는 그의 성으로 여행했다. 베르히테스가덴에서 자유로워진 콜러는 괴링을 설득하여 체암제의 피쉬호른 성에서 만나게 했고, 그곳에서 미국 육군이 5월 7일에 그들을 체포했다.[3]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41년 1월 대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제3항공함대 참모장에 임명되어 서부 전선에서 종군했다. 1942년 4월, 체르베루스 작전에서의 전공으로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훈했다. 1943년 3월 소장으로 진급했다.

한스 예쇼네크 참모장의 자살 후, 1943년 9월 공군 지도부 개조가 이루어졌을 때 콜러는 공군 통수(작전) 부장에 임명되어 중장으로 진급했다. 귄터 콜텐 참모총장이 1944년 7월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에 의한 7.20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사망하자, 당연히 콜러가 후임이 될 것으로 보였으나,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한 공군 교육 총감 베르너 크라이페를 후임으로 앉혔다. 그러나 크라이페에게는 벅찼기 때문에 11월에 괴링은 콜러를 후임 공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콜러는 항공병대장으로 진급했다.

1945년 4월 21일, 콜러는 히틀러에게 "독일 공군은 앞으로 며칠 안에 완전히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라고 상신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공군 수뇌부를 전원 해임하겠다고 외쳤다. 이틀 후 콜러는 오버잘츠베르크에 있는 괴링에게 날아가 히틀러가 자살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그것을 들은 괴링은 히틀러에게 후계자가 되겠다고 자청했고, 오히려 해임되었다.

4. 2. 히틀러 및 괴링과의 갈등

헤르만 괴링의 공군 지휘에 불만을 품은 아돌프 히틀러는 그를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으로 교체하고 싶어했다. 그라임에게 그 역할을 수락하도록 설득할 수 없었던 히틀러는 괴링에게 ''Chef des Generalstabs der Luftwaffe'' ("공군 참모총장")인 중장 베르너 크라이페를 해임하고, 1944년 9월 13일에 잠정적으로 콜러로 교체하도록 강요했으며, 11월 12일에는 콜러가 공식적으로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1] 그러나 콜러는 괴링의 잘못된 관리로 인해 유럽 상공에서 제해권을 잃은 공군을 개혁할 수 없었다.[1]

콜러는 독일 육군독일 해군에 맞서 괴링을 지지했지만, 괴링의 가장 가혹한 비판자 중 한 명이었으며 "괴링은 원활한 협력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같은 느낌, 이것이 자신에 대한 파벌을 형성하게 될 것을 거의 두려워하는 느낌이 들었다."라고 썼다.[1]

콜러는 1945년 4월 20일, 히틀러의 마지막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베를린의 ''총통 벙커''에 있었다.[1] 그날 밤 여러 고위 지도자들이 도시를 버렸지만, 콜러는 인근 베르더 (하펠)에서 공군을 대표하기 위해 남았다.[1] 괴링은 떠날 때 참모장의 경례에 답하지 않았다.[1] 콜러는 벙커 내에서 에크하르트 크리스티안 장군이 대리했다.[1] 히틀러는 콜러에게 남은 비행기와 공군 병력을 펠릭스 슈타이너의 베를린 구원에 지원하도록 명령하고, "병력을 억제하는 지휘관은 5시간 안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 마지막 병사가 투입되는 것을 당신의 머리로 보장하라"라고 설명했다.[1] 슈타이너는 그에게 남은 병력이 거의 없어 도시를 방어할 수 없었다.[1]

알프레트 요들이 콜러에게 히틀러가 자살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말한 후, 공군 장군은 4월 23일 오전 3시 30분에 오버잘츠베르크로 날아가 괴링에게 직접 알렸다.[1] 히틀러의 정신 상태가 악화되면서 나치 지도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에서 마르틴 보어만SS 병력을 보내 괴링, 콜러, 한스 람머스를 오버잘츠베르크에서 가택 연금했다.[1] 괴링은 SS 병사들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만류하고 그와 함께 마우터른도르프에 있는 그의 성으로 여행했다.[1]

4. 3. 문화재 보호 활동

콜러는 동향의 의사 막스 레프셰(:de:Max Lebsche) 박사의 주장에 따라 문화재가 남아있는 이탈리아의 도시 라벤나에 대한 독일 공군의 공습을 중단시켰다. 또한 아돌프 히틀러에 의한 독일 도시 인프라 파괴 지령(네로 지령)도 무시했다. 그는 1940년에 프랑스의 대성당 폭격을 거부했고, 히틀러의 낙하산으로 탈출한 적 조종사의 사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3] 이로 인해 군법 회의나 강제 수용소에 보내질 뻔한 병사와 시민을 구하기도 했다.[3]

5. 종전 이후의 삶

전쟁이 끝난 후, 콜러는 영국에 의해 옥스퍼드에 투옥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찰스 린드버그가 그를 방문했다.[1] 1947년 12월 석방되어 바이에른으로 돌아갔다. 1949년 전쟁 중의 속기 일기를 회고록 ''Der letzte Monat'' (''마지막 달'', 만하임)으로 출판했으며,[1] ''바이에른 독일 군인 연합''의 의장을 역임했다.[2] 콜러는 고향인 그론에서 사망했다.

5. 1. 연합군 포로 생활

종전 후 콜러는 영국군 포로가 되어 옥스퍼드에 수용되었다. 그곳을 미국 공군찰스 린드버그 대령이 방문했다.[1] 1947년 12월에 콜러는 석방되었다. 1949년에 『마지막 달』이라는 제목의 전쟁 당시의 일기를 간행했다. 이 책은 베를린 전투 동안 히틀러의 마지막 날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1] 바이에른 복원 군인회는 콜러를 총재로 선출했다.[2]

5. 2. 회고록 출간 및 사망

전쟁이 끝난 후, 콜러는 영국에 의해 옥스퍼드에 투옥되었고, 이 기간 동안 찰스 린드버그가 그를 방문했다. 1947년 12월 콜러는 석방되어 바이에른으로 돌아갔다. 1949년 전쟁 중의 속기 일기를 회고록 ''Der letzte Monat'' (''마지막 달'', 만하임)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은 베를린 전투 동안 히틀러의 마지막 날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1] 콜러는 또한 ''바이에른 독일 군인 연합''의 의장을 역임했다.[2]

6. 가족 관계

콜러는 부인과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다. 막내아들 롤란트(롤란트 콜러)는 법학을 전공하고 경찰에 들어가 1988년부터 2003년까지 뮌헨 경찰서장을 역임한 후,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니더작센주 내무차관을 지냈다. 콜러의 동생 볼프강 콜러(Wolfgang Koller, 1904-1974)는 교사이자 작가, 시인이었다.

7. 수상 내역

수상 내역
항공기 조종사 휘장
철십자 훈장 (1914) 2급, 1급
명예 십자 훈장
국방군 근속 훈장 4급 ~ 1급
주데텐란트 메달 (Prague Castle Bar)
철십자 훈장 (1939) 2급, 1급
1944년 7월 20일 부상장 흑색
공군 조종사-관측사 통합장
독일 십자 훈장 금장 (1944년 2월 7일)
철십자 기사 철십자 훈장 (1942년 4월 10일) : 대령 (참모 장교) 및 제2항공함대 참모총장


참조

[1] 웹사이트 Remembering the Battle of Berlin: The Soviet War Memorial at Tiergarten https://www.national[...] 2020-05-02
[2] 웹사이트 Koller, Karl. {{!}} WW2 Gravestone https://ww2graveston[...] 2024-03-25
[3] IMDb Der Unter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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